지난 1일, 30%에 육박하는 시청률과 함께 jtbc ‘스카이캐슬’이 막을 내렸다. 한 방송 관계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동안 국내 미디어는 ‘스카이캐슬’과 11명으로 나뉜 워너원 멤버들로 가득찰 것이다.” 그의 말처럼, 방송이 끝나자마자 온갖 미디어, 기업 마케터들 사이에서 “쓰앵님”을 찾기 시작했다. 을씨년스러운 사무실에서 형형하게 눈을 빛내는, 인정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입시 코디네이터 김주영을 연기한 김서형이 바로 그 “쓰앵님”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러나 정작 김서형은 JTBC ‘아는 형님’에 출연해 “(광고) 연락이 안 와!”라고 말하고, 온갖 인터뷰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작품의 방향성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 지금의 인기라면 다음 작품에서는 무리없이 자신이 맡고 싶은 역할을 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정작 배우 자신만 불안한 것처럼 보일 정도다.
김서형을 비롯해 대다수 여성 배우들이 높은 인기를 구가하게 된 작품은 대부분 여러 명의 여성 배우들이 뭉쳐서 이끌어 간다는 공통점이 있다. ‘스카이캐슬’에는 염정아, 김서형, 이태란, 윤세아, 오나라 등 중견 배우들이 출연해 각자 다른 개성을 보여주었고, 앞서 방영된 드라마들 중에도 비슷한 사례가 여럿 있다. tvN ‘응답하라’ 시리즈의 라미란, 김선영, 이일화도 이 작품을 계기로 더 많은 드라마에 출연했다. JTBC ‘품위있는 그녀’나 tvN ‘부암동 복수자들’도 마찬가지다. 주말드라마 중에서는 40% 시청률을 기록하며 무려 30회가 연장된 KBS ‘소문난 칠공주’가 대표적이다. 이 작품은 전혀 다른 캐릭터를 지닌 여성 배우들을 가족으로 묶어두면서 생기는 사건 사고를 담았고, 미칠 역을 맡았던 최정원은 당시에 큰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이후 이 배우들은 인기를 얻은 역할과 다른 이미지의 배역을 연기하기 어려웠다. 이유리는 ‘왔다! 장보리’에서 연민정이라는 캐릭터로 장보리 역의 오연서와 함께 인기를 얻었지만, 그후에도 그에게 주어진 대부분의 역할은 독하거나 까칠한 여성이었다. 배우 관계자 A씨는 “사실 여성 배우들에게는 한 가지 역할로 뜨면 계속 같은 역할만 들어온다.”며 “특히 드라마는 영화보다 대중적인 미디어이기 때문에 몇 가지 정해진 여성상 이외에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가 어렵다.”고 설명했다.
영화는 상황이 더 나쁘다. A씨는 “똑같이 뜨더라도 여성 배우들에게는 작품이 덜 들어오는 게 맞다.”고 말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작품이 “덜 들어오는 게” 아니다. “아예 이정도 급의 여성 배우가 주연을 맡을 수 있는 작품의 시나리오가 없다.”는 것이다. 원톱 주연을 맡을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연기력과 화제성을 지닌 여성 배우가 맡을 역할이 없다는 의미다. 특정 캐릭터로 큰 인기를 얻게 된 여성 배우에게는 대부분 두 개의 선택지만 주어진다. “드라마에서 비슷한 이미지로 꾸준히 원톱 자리를 유지하거나, 영화로 넘어가서 남성 배우들의 서포트를 하는 것.” 이때부터 여성 배우들은 선택의 기로에 선다. 첫 번째, 시청자들에게 익숙한 몇 가지의 여성상을 연기하면서 계속 드라마에 출연하며 실리를 찾는다. 두 번째, 매우 드문 여성 중심의 시나리오 중에 하나를 고르거나 여성 배우의 비중이 그나마 높은, 혹은 화제가 될 만한 시나리오를 골라 영화 쪽에 진출한다. 어느 쪽을 택하든 그것은 배우의 판단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여성이기 때문에 강제로 선택해야만 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진경, 장영남 등 뛰어난 연기력을 지닌 여성 중년 배우들이 영화에서는 남성 배우들의 아내 역할에 그치거나 ‘독전’의 김성령, ‘악녀’에서의 김서형처럼 매우 적은 분량만을 할당받곤 한다. 반면에 그들과 비슷한 나이와 경력의 남성 배우들은 훨씬 더 많은 작품에서 다양한 역할을 소화할 수 있다. 이미 ‘멋있는 중년 아저씨’, ‘왕 역할 전문’, ‘정의로운 형사’, ‘열심히 가족을 위해 노력하는 아버지’처럼 수식어만 들어도 떠오르는 남성 배우들의 얼굴이 있다. “여성 원톱 영화의 경우에는 결과가 좋지 않으면 다음은 없다. 안 그래도 없는 시나리오는 점점 더 없어진다.”(라)는 관계자의 말처럼, 여성 배우들에게는 지속적인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광고 시장은 가장 대중적인 방향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여성 배우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지금 김서형의 유행어는 여기저기에 쓰이지만, 수많은 광고에서 실제 그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한 기업의 온라인 마케팅을 맡고 있는 B씨는 “일단 유행어가 생기면 바이럴 마케팅에 활용하는 것이 SNS 시대의 관행”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김서형을 광고에 기용하지 않는 이유는 의외로 명쾌했다. “직접 기용하면 당연히 좋겠지만, 캐리커처를 쓰는 게 명백한 불법이 아닌 상황에서 대다수 기업들은 유행어만으로도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본다.” 윤리적 문제를 제기할 수는 있지만, 이것이 법적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으며 그들 입장에서는 “빠르게 유행이 바뀌는”, “요즘처럼 ‘짤’만으로 광고가 가능한” 시대에 굳이 그 배우를 기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생리대부터 화장품 광고까지 남성 방송인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하는 현실에 비춰 봤을 때 분명한 모순이다. 배우 기획사 관계자 C씨는 “드라마 속 김주영의 이미지는 광고에 활용하기에 굉장히 좋다. 예를 들어 보험회사 광고라고 가정했을 때, ‘00화재를 전적으로 믿으셔야 합니다.’보다 좋은 카피는 없다.”면서도 “그 이미지를 모든 광고에 활용하면 오히려 신뢰가 떨어지고, 장기적으로는 배우에게도 손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애초에 보험회사, 자동차 광고는 강하고 순종적이지 않은 성향의 캐릭터를 연기한 여성 배우들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김서형이 대중이 일반적으로 보기 원하는 여성상은 아니”라는 B씨의 말이 그것을 증명한다.
“여배우의 ‘선택의 폭’을 좁히는 건 우리가 아니라 시장이다(스포츠한국).” 최근 김서형이 인터뷰를 하면서 남긴 말은 그가 10년 전 SBS ‘아내의 유혹’에서 신애리를 연기하며 인기를 얻은 후 “항상 이만큼이 힘든 거다. 평균을 유지한다는 게”라며 눈물을 흘린 그 때와 지금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수많은 관계자들의 이야기처럼, 여전히 여성 배우들은 나이, 경력, 실력과 상관없이 원하는 만큼의 다양한 배역을 맡을 수 없다. 김서형 또한 차가운 악역이나 직장 상사, 혹은 액션 신 하나 없는 국정원 요원 역할이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이 역할들을 잘 소화해냈고, ‘스카이캐슬’ 이후에 보다 당당하고 직설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 “남자 배우들만 잔뜩 나오는 영화 지겹지 않냐”, “퀴어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 등 그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여성 배우들이 그동안 무엇에 목말라 있었는지 드러낸다. 그리고 지금, 젊은 여성 배우들 중에도 10년 전의 김서형과 마찬가지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다. ‘응답하라 1988’에서 혜리의 까칠하고 똑똑한 언니로 나와 인지도가 높아진 배우 류혜영은 박보검, 류준열 등이 승승장구하는 동안 오히려 3년 간 작품을 쉬었다. 그는 올리브TV ‘은주의 방’으로 복귀하기 이전까지 “큰 사랑을 한번에 받다보니 이 사랑에 부응하고 싶다는 욕심이 컸다.”면서 “조급하게 일을 처리하다가는 그르칠 수 있겠다고 생각(스포츠한국)”했다고 털어놨다. 김서형을 비롯한 많은 주목 받은 여성 배우들에게 지난 10년보다 양적으로, 질적으로 더 많은 기회가 돌아가야 하는 까닭이다.
디자인 | 전유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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