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연출하고 한 편의 새로운 영화처럼 완성해나가는 멋진 뮤지션의 삶.
엄정화의 신곡 ‘엔딩 크레디트’에는 텅 빈 관객석을 두고 춤을 추는 그의 모습이 계속 등장한다. 이별하는 연인의 감정을 묘사한 곡이지만, ‘한 편의 영화 주인공 같던 난 이젠 없어’라는 가사는 50대를 앞둔 그가 현재를 한탄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엄정화가 컴백에 맞춰 가장 먼저 출연한 예능 프로그램은 MBC Every1 ‘주간 아이돌’이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나갈 데가 없었다”며 웃던 그는 자신의 현재에 대해 “영화가 끝나야 또 새 영화가 시작되니까” 계속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나 ‘띵작(명작을 일컫는 은어)’ 되게 많아!” 하지만 ‘주간 아이돌’에서 엄정화는 자신의 신곡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 의도적으로 조악한 분위기를 내는 ‘주간 아이돌’의 세트에서 어떻게든 신곡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자신의 신곡에 대해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경력이라면 과거 이야기만으로도 2회에 걸쳐 이야기해야 할 것 같지만, 추억을 곱씹는 것은 ‘랜덤 댄스’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런 그의 태도는 그가 과거의 스타인 동시에 여전히 동시대적 존재로 자리할 수 있는 이유다. 배우 정우성은 엄정화에 대해 말하는 인터뷰에서 ‘포이즌’ 전주를 흥얼거리며 “우리 세대 남자들은 전주만 나오면 다 들썩거린다”고 말했다. 걸그룹 구구단의 멤버 김세정도 “2016년을 그린 드라마가 나온다면 엄정화 선배님도 같이 나올 수 있다는 얘기 아니냐. 영광이다.”라며 기뻐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상영되는 클래식 영화들처럼, 엄정화는 지난 20여 년 이상 끊임없이 회자되고, 시대에 따라 재평가되는 뮤지션이 됐다. 지금 대중음악 산업에서 젊은 뮤지션들이 콜라보레이션을 할 때 헌정 차원이 아니라 새로운 시도를 추구하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이 엄정화다. 후배들까지도 놀라워하는 엄정화의 다양한 콘셉트는 2016년 12월부터 ‘파트 1(첫 번째 꿈)’과 ‘파트 2(두 번째 꿈)’로 나눠 발표한 ‘더 클라우드 드림 오브 더 나인’ 앨범에서 잘 드러난다. 지난해에는 파격적인 시스루 의상을 입은 남성 댄서들과 춤을 췄지만, 올해에는 젊은 뮤지션들이 잘 시도하지 않는 돌돌 만 레트로 펌에 발랄한 자줏빛 미니 드레스로 철 지난 유행을 소환한다. 콘셉트에 맞게 각 앨범의 피처링 상대에도 변화를 줬다. ‘파트 1’에서 샤이니 종현과 함께 나른한 러브송을 불렀던 그가 이번에는 자신과 비슷한 시기부터 활동을 시작한 핑클 출신 이효리와 샤크라 출신 정려원을 택해 일렉트로닉한 팝을 선보인다. ‘엔딩 크레디트’의 가사가 갖는 허무한 감정과 새로운 시작에 대한 희망은 자신과 함께 지금껏 살아남은 여성 연예인들과의 협업으로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가수 엄정화는 시대의 흐름을 따르면서도 자신만이 얘기할 수 있는 특별한 스토리를 놓치지 않는다. 자신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연출하고 한 편의 새로운 영화처럼 완성해나가는 멋진 뮤지션의 삶이다.
엄정화는 ‘주간 아이돌’에서 “나 아이돌이야?”라며 즐겁게 웃는다. 하지만 신곡 뮤직비디오 촬영 도중에 “극장에서 촬영했고 실제로 마지막 장면에서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데 (중략) 너무 고맙고 너무 큰 인연”이라 눈물이 났다고 말한다. 아이돌과 25년 차 연예인을 오가는 것만으로도 엄정화의 삶은 가요계에서 드문 기록이 된다. 확실한 것은, 아무나 살 수 있는 인생은 아니다. 엄정화는 지금도 영화의 주인공으로 살고 있다.
2017.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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