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양상의 책임은 근본적으로 ‘프로듀스 X 101’을 제작한 Mnet에 있다.
“속보로 뜨던데요? 얼굴이 모자이크 처리가 돼서 나오는데 황당하더라고요. 내 ‘최애’가 범죄자도 아니고.” 아슬아슬하게 탈락한 연습생 중 한 명을 응원했던 팬 A씨가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 지난 7월 26일, Mnet ‘프로듀스 X 101’에서 최종 멤버를 뽑는 마지막 생방송이 열렸다.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최종 선발된 11명의 투표 결과에서 공교롭다고 하기에는 기이할 만큼 비슷한 표차가 발견됐다. 결국 7월 31일, 서울지방경찰청 사이버수사대는 이 프로그램을 제작한 CJ ENM 사무실과 문자투표 데이터 보관업체 등에 대해 압수수색을 실시했다고 밝혔다. A씨는 주변에 투표를 독려했던 지난 몇 주간의 자신의 모습에 대해 매우 자조적이었다. “왜 ‘프로듀스 101 시즌 2’는 봐가지고……. 다 제 잘못이죠.”
A씨의 불만은 지금 ‘프로듀스 X 101’을 시청했던 어떤 부류의 시청자들이 느끼는 감정이기도 하다. ‘프로듀스 X 101’과 관련된 DC인사이드 갤러리와 아이돌 팬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SNS 플랫폼인 트위터에서는 ‘프로듀스 X 101’ 출연자의 팬들끼리 서로 갈등을 빚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다. 여기서 ‘서로’란, 조작을 의심받고 있는 투표 결과로 인해 피해를 봤다고 주장하는 쪽과, 조작이 있었든 없었든 내가 응원했던 연습생, 즉 곧 데뷔 예정인 보이그룹 X1이 된 특정 멤버를 욕하지 말라고 주장하는 쪽을 가리킨다. 여기에 X1의 멤버를 모두 지지하는 ‘11인 지지’와 일부 멤버를 배척하는 ‘n인 지지’, X1에 들지 못하고 탈락한 9명의 연습생들을 묶어 ‘바이나인’이라는 팀을 결성하자고 하는 팬들도 있다. 심지어 그 안에서도 “내 최애는 ‘바이나인’으로 포함시키지 말라.”라는 팬 등 그들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싸운다.
과열된 팬덤이 빚어낸 일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양상의 책임은 근본적으로 ‘프로듀스 X 101’을 제작한 Mnet에 있다. A씨는 ‘프로듀스 101’ 시즌 2에 대해 “그때 워너원 팬덤은 멤버들의 V앱과 ‘쇼콘’을 기다리면 됐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번 시즌에서 그가 기다리는 것은 오직 “진짜 순위 뿐”이다. 투표 결과 자체를 믿기 어려운 상황에서 데뷔할 팀에 대해 즐거운 상상만 할 수는 없다. 단지 투표만 한 팬이 아니라면 더욱 그렇다. ‘프로듀스 X 101’이 방송되는 동안 몇몇 출연자의 팬덤은 지지하는 출연자에 대한 투표 독려를 하며 ‘투표 인증샷’을 남길 경우 추첨을 통해 당첨자에게 상품을 주는 이벤트까지 했다. 상품으로는 상해 디즈니랜드 2인 3박 4일 여행권도 있었다. 단지 팬이라고 하기엔, ‘프로듀스 X 101’의 많은 팬덤은 정말 많은 돈과 시간을 썼다. 그들이 이 프로그램의 투표 조작 논란에 분노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애초에 투표로 아이돌 그룹의 연습생을 뽑으면서 아이돌 팬덤의 성격을 변화시키는 데 영향을 미친 것 역시 ‘프로듀스’ 시리즈다.
‘프로듀스 X 101’ 탈락 연습생의 팬인 B씨는 말한다. “연말정산도 안 되는 돈을 쓰는 이유는 딱 하나다. 전에 ‘국프’들이 원하는 대로 되는 걸 봤으니까.” ‘프로듀스 101’ 시즌 2를 통해 그들의 팬덤은 자신들이 응원하는 연습생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경험을 했다.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투표를 독려하고, 더 나아가 돈을 들여 선거 운동을 했던 이유다. 시즌 2 종영 이후에도 Mnet은 타이틀 곡 선정, 유닛 곡 선정 등에서 투표를 활용했다. 팬들은 ‘국민 프로듀서’라는 이름으로 팀의 멤버 구성, 타이틀 곡 선정 등에 참여할 수 있었고, 팬덤은 그들의 목소리를 내는 법을 학습했다. ‘실검(실시간 검색어)’과 ‘실트(실시간 트렌드)’에 영향력을 쏟아 부었고, 여론을 조성하면 방송사와 출연자 모두 그 영향을 받는다. ‘프로듀스 X 101’ 방영 기간 동안 실력이 부족한 출연자의 팬덤에서는 해당 출연자에게 ‘잠죽자’(‘잠은 죽어서 자자’의 줄임말)라며 끊임없이 연습할 것을 강요했다. 동시에 그들 스스로도 ‘잠죽자’를 외쳤다. 투표 독려를 해야했기 때문이다.
보이그룹 JBJ는 ‘프로듀스 X 101’에서 일어날 일들의 전조였다. JBJ는 ‘프로듀스 101’ 시즌 2의 일부 탈락자들 요구로 결성됐다. 팬덤이 모여 목소리를 내면 이뤄진다. 팬덤이 투표하는 ‘국민’에만 머무르고 싶어하지 않게 된 것은 당연하다. 그들은 ‘프로듀서’가 되고 싶어졌다. X1 결성 직후, 최종 투표 탈락자들의 팬덤은 가상의 팀 ‘바이 나인’을 통해 팀 결성을 요구했다. 그들은 이 팀의 활동을 위한 구체적인 기획안을 만들고, 홍보를 위해 스스로 움직였다. JBJ를 응원했던 팬 C씨는 “‘바이나인’을 만들고 싶은 팬들을 위해 우리가 어떻게 했는지 가서 알려주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C씨는 “JBJ 팬들이 파생 그룹 결성을 요구할 때 어디에 어떤 자료를 보냈는지, 어떤 식으로 온라인에 홍보를 했는지 등 많은 것을 알려줬다.”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또한 투표 조작 논란이 일자 ‘바이 나인’ 팬덤 중 일부는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위원회를 만들었다. 제대로 된 투표 결과를 공개하라며 300명의 탄원서를 받아 방송사를 고소하고, “홍보의 문법을 따르자.”라면서 합정역과 압구정역처럼 젊은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 ‘바이나인’ 결성을 위해 광고판을 설치한다. 이미지 메이킹, 홍보, 마케팅, 법률 대리, 공문서 작성 등 이제 팬들은 못하는 게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 ‘프로듀스101’ 시즌 2 이후의 보이그룹 팬덤은, B씨의 이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팬들은 아는 게 너무 많다.”
그러나 JBJ는 멤버 중 몇몇 소속사가 활동 연장을 반대하면서 현재는 듀오 JBJ95로 활동 중이다. C씨는 “(멤버들의 탈퇴를) 막을 수는 없었다.”라고 말한다. 팬덤은 그룹 결성에 표, 돈, 심지어 프로듀싱의 영역 중 일부까지 기여한다. 그만큼 팀에 대한 영향력이 높아지기를 원하고, 어느 정도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기도 하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소속사와 연습생의 계약 관계에 관여할 수는 없다. 이것은 좋아하는 아이돌을 두고 팬과 소속사 사이에서 팬이 갖는 태생적인 한계다. ‘프로듀스 101’은 투표를 통해 팬에게 더 큰 영향력을 주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유가 무엇이든, 어디까지가 진실이든 그 투표 결과가 실제와는 다르게 공표됐다. 투표를 어떻게 하든 방송사가 마음만 먹으면 숫자를 바꿀 수 있다. 팬덤은 자신들의 목소리에 힘이 실릴 거라고 믿고, 그 희망이 커질수록 자신이 가진 것들을 소모하고 있다. 하지만 투표 조작 논란은 결정권이 여전히 방송사와 출연자들의 소속사에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 프로그램은 팬덤이 더 열심히 움직여야할 이유를 제시하는 것 같았지만, 근본적으로는 아이돌의 팬이 되는 것에 대한 이른바 ‘입덕 장벽’을 더 높게 세웠다. 방송사와 제작사는 마치 팬들에게 모든 것을 맡긴 것처럼 돈, 시간, 홍보, 기획력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들은 정작 팬들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다. 그 사이 좋아하는 아이돌을 성공시키기 위해 잠은 죽어서 자자는 마음으로 움직여야 한다. 피로는 계속된다. 그런데 바라는 것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팬은 대체 왜 ‘프로듀서’까지 돼야 한단 말인가?
2019.08.06 이미지 디자인 전유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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