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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리의 6집 ‘BLACK’은 그의 다큐멘터리 같다. 살아온 공간에 대한 성찰을 담은 ‘SEOUL’부터 정치, 사회적 활동을 했던 경험에서 출발한 마지막 트랙 ‘Diamond’까지, 앨범은 그가 삶에서 얻은 경험과 하고 싶은 말들을 풀어놓는다. 타이틀곡 ‘BLACK’의 가사 ‘나를 부정하듯 바꿨던 머리색과 다문 입을 가린 빨간 립스틱’은 그동안 섹시함을 강조한 댄스곡들을 통해 이효리를 알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도전처럼 보인다. ‘SEOUL’에서는 오랫동안 서울에서 살았으나 한 발짝 떨어져 있으면서 비로소 복잡한 공간의 속성을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우린 숨고 싶어 해 자꾸만 입어 검은 옷’과 같이 냉담한 시선으로 표현했다. ‘변하지않는건’의 가사는 섬뜩하기까지 하다. 방부제를 넣어 만든 식빵에 사진 속 자신의 얼굴을 비유한다. 이미 많은 뮤지션들이 시간의 덧없음이나 변화하는 인간 또는 물건의 속성에 대해 노래했지만, 손꼽히는 셀러브리티 겸 뮤지션인 그가 ‘조금도 변하지 않는 이상한 저 얼굴’을 말하는 건 다르다. 구체적으로 여성 연예인의 삶을 깊숙하게 바라볼 여지가 생긴다. 음악 산업에서 여성 싱어송라이터가 갖는 위상이 어디서부터 출발하는지 고민해볼 수도 있다. 앨범으로서 ‘BLACK’의 의의다.
그러나 이효리가 앨범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는 JTBC ‘뉴스룸’을 비롯,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서 그가 했던 말들과 겹친다. 앨범 수록곡 중 자신의 스웨그를 보여주는 곡 ‘White Snake’의 “나를 찾아와 지혜를 구하리라”는 구절이 신선하게 느껴질 만큼, 그의 노래는 자신이 그동안 풀어놓은 일상과 가치관의 반복에 가깝다. 물론 미디어에서 발언하는 것과 정제된 가사를 쓰는 것은 다른 일이다. 하지만 그 가사의 가치는 음악을 통해 완성된다. 이효리는 본인 스스로 자신이 뛰어난 가창력을 지닌 가수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앨범의 1/3을 단출한 사운드에 자신의 목소리만 얹은 곡으로 채운다. 물론 JTBC ‘뉴스룸’에서 이효리가 말한 것처럼 “가능한 것만 꿈꿀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6번째 트랙 ‘비야 내려’에 대해 이효리는 “피아노 한 대로 노래를 한 적이 없었다. 노래를 뽐낼 수 있는 엄청난 가창력을 가진 게 아니라서 피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효리는 ‘Black’의 수록곡들에서 여기에 도전하기는 했지만, 결국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많은 곡들이 가사의 스토리텔링만 남을 뿐 이효리의 노래나 곡의 기술적 완성도를 통해 그 이상의 것은 주지 못한다. 기교가 필요한 발라드곡에서 “기교를 잘 넣지는 못하지만”이라고 전제를 붙인다면, 그 곡의 가치는 결국 다시 메시지가 주는 울림이 있는가로만 평가받을 수 있다. 앨범에서 ‘SEOUL’에서 보여준 시니컬한 정서가 ‘변하지않는건’에 이르러 최고치를 찍지만, 결국 발라드 ‘Diamond’에서 싱겁게 마무리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본인의 이야기만이 아닌 음악적인 역량이 더욱 필요한 순간, 이효리의 ‘하고 싶은 것’이 아닌 ‘할 수 있는 것’은 한계를 드러낸다.
이효리가 출연한 MBC ‘무한도전’을 본 사람은 ‘Seoul’ 뮤직비디오에서 현대무용을 활용한 춤을 선보이는 것이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있다. 그 맥락을 통해 그의 춤이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뮤직비디오만을 놓고 봤을 때 이효리의 춤이 ‘Seoul’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서울이란 도시의 무엇을 표현하려고 했는지, 그가 놓인 공간과 그 속에서의 움직임이 잘 표현된 것인지는 다른 문제다. ‘Seoul’에서 그가 보여주는 춤은 뮤직비디오 각각의 컷에 어울리는 동작일 수는 있어도, 본인의 춤만으로 진행되는 뮤직비디오를 끌고 갈 만큼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되지는 못한다. 그는 앨범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은 충분히 했다. 하지만 그것이 이효리가 싱어송라이터로서 하고 싶은 것을 했다는 것 외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찾기 어렵다. 이미 지난 앨범에서 스타이자 여성으로서 자신의 삶을 표현한 ‘미스코리아’가 있었음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이효리는 앨범의 부진한 음원 차트 성적에 대해 “대중들이 엄청 좋아할 줄 알았다. 내가 감을 좀 잃었는지”라고 말하며 웃었다. 하지만 이효리의 ‘BLACK’에는 최근 빌보드 차트에서 인기를 끄는 뭄바톤, EDM 사운드, 그리고 그루브를 강조한 보컬의 요소까지 살렸다. 안무는 한국 아이돌 퍼포먼스에서 새로운 경향으로 떠오른 현대무용의 포인트를 살렸다. 문제는 방향이 아니라, 그 방향이 이효리에게 어울렸던 것이냐는 점 아닐까. 예능 프로그램에 등장해서 화수분처럼 이야기를 풀어놓는 이효리는 생기가 넘치고 쿨하다.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옷을 입은 느낌이다. 그러나 ‘BLACK’의 이효리는 하고 싶은 것을 한다는 정도에 머물러 있다. 아직까지는, 예능 프로그램에 나오는 이효리가 가장 멋져 보인다.
2017.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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